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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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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5-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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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 후 식탁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데 친한 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업무 시간 전화하면 방해가 될까 늦은 시간 전화를 했단다. 상가 임대차 종료 후 임대인이 도배를 해야 한다며 보증금 2000만 원 중 1000만 원을 돌려주고 있지 않고 있는데, 불만이면 소송을 제기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변호사 사무실에 가보니 기본 수백만 원을 착수금으로 요구하던데 막막하다는 이야기였다. 대략 도움을 주기로 하고 전화를 끊는데 몇 분 뒤 대학 동기 녀석 전화가 왔다.

업무 시간 전화를 하면 방해가 될까 싶어 퇴근했을 것 같은 때 전화를 했단다. 지인이 인터넷에 글을 하나 작성했는데 명예훼손으로 수사를 받게 되어 조언을 구한단다.

간략히 상담을 마치고 샤워를 하고 나오니 부재중 전화가 와있다. 주차장 차단기를 통과하던 중 앞 차와 추돌이 발생했는데 피해자 측이 병원에 입원을 하는 것이 말이 되냐는 이모님의 분노 어린 전화였다.

보험 접수를 안 할 수는 없냐는 내용이었다. 낮에 전화하면 방해가 될까 늦은 시간 전화해서 미안하다는 말씀에 “별말씀을요. 언제든 전화 주세요.”라며 전화를 끊는다. 조금 쉬다 침대에 누워 하루 중 잘못된 답변은 없었는지 되새겨 보다 잠에 든다.
 
매일 지인, 친구, 친척 등 많은 이들의 삶에 파고든다. 그래서 변호사의 삶은 스트레스의 반복이다. 내가 벌인 일도, 내가 겪는 일도 아니지만 상황에 뛰어들어 해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 분쟁들의 중심에 두 발을 딛고 있다 보면 감정의 끈은 늘 긴장감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예전 필자가 변호를 맡았던 한 사건의 피고인이 기억난다. 강력 범죄 사건이었는데 피고인은 구속 상태였으나 범죄사실을 전부 인정하고 반성하는 어린 친구였다. 수차례 사죄의 뜻을 전달하였고 통상적인 합의금보다 높은 위자료를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피해자 측은 피고인을 용서하고 처벌불원서까지 받을 수 있었다.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선고기일, 집행유예를 예상하고 있는 통상적인 형사 사건이었다. 그러던 어느 주말 저녁, 핸드폰을 열어보니 의뢰인 모친으로부터 수차례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연락해 보니 피고인의 부친이 돌아가셨다 게 아닌가. 토요일 밤 급히 사무실에 복귀하여 속히 구속집행정지 신청을 하였다. 통상적으로 직계가족의 장례 참석 등은 허가가 되기 때문이었다.

늦은 밤 당직실에 신청서를 제출하고 법원 앞 벤치에 앉아 한참을 기다렸다. 10시가 넘어 법원 직원분의 연락이 왔으나 주말이라 담당 판사님의 결재를 받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던 그 발걸음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조금 더 빨리 오후에 전화를 받았더라면, 주말이더라도 무음이 아닌 벨소리 설정을 해 두었더라면 피고인이 부친의 장례에 적어도 참석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조금 더 빨리 합의가 되었다면 이미 석방 상태로 사회에 복귀하지는 않았었을까 자책하던 밤이었다.

늦은 밤 전화를 꺼놓지 않고 받는 때가 그 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너무 늦은 답변”으로 그들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쳐버릴까 하는 강박증이 생겼다. 문득 초임 변호사 시절 선배님이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대략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할 때, 식사를 할 때, 주말에 아이와 영화관에 있을 때에도 늘 의뢰인, 내가 상담한 사람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해야 하는 이들을 늘어날 것이고 염두 해야 하는 사항들은 점점 쌓여만 갈 것이다. 변호사로 오래 일하려면 이 숙명을 어떻게 이겨낼지 잘 고민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나의 일로 스트레스를 받아주는 변호사”가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만일 나에게 무슨 일이 발생했을 때 “나의 일을 처리해 주며 스트레스를 전혀 받지 않는 변호사”는 조금 서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매일 같이 해법을 찾아나가려는 노력,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순간을 마주할 때 돌파하려는 시도, 그리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마지막 남은 방법을 고민하는 수고로움이 오히려 고마울 것 같다.

오늘도 울리는 전화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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